베트남 통일의 숨은 주역, 레득토 (Lê Đức Thọ)
2025년, 베트남은 남부 해방 5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호찌민시)이 함락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고, 남과 북은 하나의 국가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이날은 **남부 해방기념일(Ngày Giải Phóng miền Nam)**로 지정되어
베트남 전역에서 퍼레이드, 음악회, 전시 등 다채로운 행사가 개최됩니다.
통일은 단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베트남 국민의 오랜 염원이 실현된 날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 통일의 길목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총을 든 장군이 아니었고,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지만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역사를 움직인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레득토(Lê Đức Thọ) 입니다.

레득토 (Lê Đức Thọ)는 누구인가?
1911년 베트남 북부 남딘성(Nam Định) 출신인 레득토는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 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에 몸담았습니다.
1930년, 그는 베트남 공산당 창립 멤버로 활동했고,
수차례 투옥되면서도 항일 민족해방 운동과 조직 구축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진짜 존재감은 1960년대 이후, 미국과의 평화 협상 테이블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그는 북베트남 노동당의 정치국 위원이자 대미 외교 전략 수석으로
베트남 전쟁의 외교적 해결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는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정부의 고위 협상가로서, 미국과의 외교 전선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파리 평화협정과 노벨평화상 수상 거부
레득토의 대표적인 업적은 바로
1973년 파리 평화협정(Hiệp định Hòa bình Paris) 체결입니다.
이는 미국과 북베트남 간 협상으로, 미군 철수, 포로 송환, 정치적 합의 등을 담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종전의 기반을 다진 역사적 외교 성과였습니다.
당시 미국 측 협상가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고,
레득토는 북베트남을 대표해 수년간 고위급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그 공로로 두 사람은 1973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레득토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베트남에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
– 레득토, 수상 거부 이유
그의 이 결정은 노벨상 역사상 전례 없는 사례였고,
통일과 정의에 대한 원칙을 지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외교가 만들어낸 전환점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은
결과적으로 파리 평화협정으로 구축된 외교적 전선이 불러온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물론 실제 통일은 군사작전으로 완성되었지만,
그 이전 수년간 진행된 협상과 합의는 미국의 철수, 남베트남 정권의 약화 등
전체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레득토는 전장에서 싸우지 않았지만,
외교의 전장에서 베트남 통일의 문을 열어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용한 전략가”, “평화의 설계자”로 불립니다.
그의 유산은 무엇을 말하는가
레득토는 1986년까지도 당의 지도부에서 활동하며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참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현재도 하노이와 호찌민시의 거리, 학교, 정치학 자료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베트남 국민에게 그는 단지 공산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외교와 정치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시킨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됩니다.
2025년, 남부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전쟁의 영웅들만이 아닌
조용한 힘으로 미래를 만든 인물들을 함께 조명해야 합니다.
마무리
레득토의 생애는
폭력보다 협상, 힘보다 신념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외교 전략과 정치적 원칙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Insights into Vietnam, with 360VINA
우리가 몰랐던 베트남 통일의 이면,
레득토를 통해 다시 읽는 4월 30일의 의미.